홍순용은 1909년 9월 28일(음)전남 무안군 해제면 신정리405번지에서 홍성춘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해제중앙교회 집사로 봉사하던 중 한국전쟁을 만났다. 1950년 7월 22일 공산당에게 체포되었으며, 8월 7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끌려나가 총칼로 살해되었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고 글씨가 얼마나 미문(美文)이었던지 동리에선 명필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견선여불급(見善如不及)하고 견불선여탐탕(見不善如探湯) 하라. 착한일을 보거든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악한 일을 보거든 뜨거운 물을 더듬는 것처럼 하라” 순용의 머리는 총명했으나 가정이 부유한 편이 아니어서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각처에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고 시도해 보기도 하면서 심지어는 일본을 왕래하며 사업을 개척해 보려는 꿈을 가지고 노력도 해 보았으나 당시 태평양전쟁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결국 홍순용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장사를 하였다. 그의 나이 36세가 되었을 때 해제교회에 출석하는 천기조장로가 홍순용에게 다가왔다. “홍선생 예수 믿으시오. 믿어야 삽니다.” “아니 그럼 내가 죽었단 말이요?” “예수 믿지 안고는 살았어도 죽은거지요. 암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지요.”
처음엔 천 장로의 전도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으나 천 장로는 집요하게 전도했다. 그런데 천장로가 자꾸 찾아올수록 이상하게 가슴을 압박했다. 악몽까지 꾸게 되었다. 게다가 그때 전도사까지 합세했다. .“홍 선생 위해 기도해 주러 왔지! 엊저녁 꿈에 홍선생이 괴로워하는 꿈을 꾸고 보니 찾아보고 싶어서 왔어!” 김전도사는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는데 홍순용의 방으로 성큼 성큼 들어왔다. 김전도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답답하던 체증이 확 뚫리는 것 같으면서 찌프둥하던 머리가 상쾌해왔다. 홍순용의 입신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의 입신으로 그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장자가 그것도 조상 봉제사할 사람이 사교인 야소교에 몰입돼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버지 홍성춘은 펄펄 뛰며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지만 “아버지, 제가 예수 믿는 것은 집안 잘되자고 믿는 것인데 왜 쑥대밭을 만듭니까.” 또 지병 속병인 체증도 하루 아침에 고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의사라고 해도 못고치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의 부친은 농사를 지으면서 한의술을 습득해 농촌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고마운 분이었다. 더욱이 그는 피부병에 좋다는 고약을 개발해 치료해 주기도 해 환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질 않았다. 한약재도 집안에 가득 가득 쌓여 한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홍성춘씨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집안에서 떠나 주기를 요구했다. “이놈, 더 이상 너를 보기 싫으니 우리 집에서 나가거라.” 홍순용은 더 이상 아버지를 모실 수 없을 정도로 신앙문제로 인하여 분가 하기에 이르렀고 가솔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야 했으며 예수 믿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는 절감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자는 얻으리라(마 10:34-39). 그는 지역사회 유지로 알려저 동리 이장 일을 보면서도 북과 장고를 치며 전도하여 해제면의 많은 인재를 교회로 인도했다. 홍집사는 성령을 받아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해 지역사회에 많은 감화를 끼치는 복음의 증인이였다고 지역 사회에 알려지고 있다. 해방 이후 조국수호를 위해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자 집에는 빨간 페인트칠을 해서 구분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한국전쟁이 터지고 지방 빨갱이들은 죽창을 들고 교회 책임자들에게 찾아와 생명을 위협했다. 결국 그는 총을 소지한 채 공산군에 체포당했다. 그가 잡히기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그는 총을 지녔기에 죽창을 든 공산군들을 죽일 수도 있었으련만 그는 죽이기를 포기하고 죽는 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에게 체포되어 해제면 내무서로 끌려갔다.
악랄한 공산당은 출가한 큰 딸 홍정임마저 끌어내어 몽둥이로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몸을 던졌다. 그런 공산당이니 홍집사는 얼마나 두들겨 팼겠는가? 홍정애와 관표가 면회를 가자 그는 자녀들에게 등물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님을 뵙더라도 깨끗한 몸으로 뵈어야 할 것이니 너희들의 손으로 친히 몸을 깨끗이 씻어 주기 바란다.“ 자녀들은 울면서 등을 밀어주었다. 피멍이 들어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홍 집사는 등물을 마친 후 자식들을 그 앞에 앉히고는 기도한 후 부탁했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그 이튿날 새벽4시 5인의 지사들이 해제초등학교 교정으로 끌려나갔다.
임인재 장로, 김판업집사, 황인경집사, 홍순용십사, 경찰관 김지선 경위였다. 다섯 사람은 인민재판을 받고 총살형을 받았다. 그런데 인민군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총살당해 순교한 홍순용 집사의 시신만은 칼로 자상하여 확인사살을 한 것이다. 다섯 사람이 순교할 당시 바다 가운데 우뚝 선 마실산에선 다섯 개의 불덩이가 치솟아 올라 사형집행자들이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고 목격자의 말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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