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5월 23일 경북 의성군 다인면 봉저동 520번지에서 엄규영 영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9년 1월에 장로회 총신을 졸업하고 강도사로 시무중 1950년 겨울 인민군 패잔병에 의해 순교했다.
중국 봉천학교 졸업 1949. 01. 장로회총회신학교 졸업(43회) 신학교 재학중 양지교회 목회 1948년 12월 초 화목교회 부임 1950년 9월 까지 목회
일제수탈에 못견디어 만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심양에 정착 보통학교를 마치고 농사를 지었다. 이같이 신사참배를 피해 더 깊은 농촌으로 들어가서 사는 그의 삶은 우울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모택동 공산정권의 팔로군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곡식과 돈될만한 것은 무조건 강탈했다. 그동안 피땀흘려 일군 넓은 농토와 집을 포기하고 빈손으로 해방 2년만에 고국에 돌아오고 쌍둥이 동생만 남았다. 봉천에서 아버지를 따라 서탑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복음을 위한 소명에 불타 총신에 입학 졸업을 1년 앞두고 YMCA총무 이원우목사님을 만나 의성군 사곡면 양지동에 양지교회에 교역자로 31세에 첫 목회를 시작한지 6개월만에 1948년 12월에 화목교회 초청을 받아 두번째 목회를 하였다.
1949년 1월에 장로회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강도사 인허를 받고 2년이 못되어 6.25가 발발했다. 9.28수복이 되자 서울과 대구사이에 포위된 인민군들이 낮에는 산에 들어가 숨고 밤에는 민가에 가축과 곡식을 약탈하고 하는 와중에 여러명의 순교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
1950년 9월 어느날 새벽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 9.28 UN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자 후퇴하는 10사단 인민군이 군관민에 밀리다가 보복으로 화목교회를 중심하여 갑자기 20분간 기총사격을 가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아내와 간난아이는 놀라서 숨을 거두고 엄강도사는 구산동에 사는 신춘삼씨와 체포되어 의성군 춘산면 옥정동에 본부를 둔 패잔병들 집결지에 끌려가 엄동설한에 몇날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인민군 10사단장에게 호출되어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변절의 뜻이 없음을 판단한 사단장은 황혼이 짙어갈 무렵 엄강도사를 끌고 옥정동(바랑골)으로 간 후 소식이 끊겼으니 이것이 마직막으로 가는 순교자의 길이 되었다. 함께 납치되었던 정정수 김원갑, 권창규씨가 증언한 내용이다.
군경 합동으로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했다는 소식을 들은 1개월 후 춘산면 소칭 바랑골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뒤지다가 엄전도사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하의는 다 찟겨진 상태였으나 얼굴 모습은 평화로운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와 가슴에는 열아흡군데 날카로운 창검자국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엄전도사는 순교 직전에도 무례한 인민군들의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과 섬기는 화목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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