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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5
 제목  현대 이스라엘(간추린 이스라엘사)
 주제어  [이스라엘]
 자료출처  이스라일문화원  성경본문  
 내용 ■ 독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의 옛 땅에서 되찾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인구 1%에 해당하는 6천 여 명 이상이었다. 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 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 정부 수립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권자의 85%가 참가한 총선(1949년 1월 25일)으로 초대 의회인 제1회 크네세트가 개원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이 되어온 두 명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태인 사무국의 사무총장 다비드 벤구리온이 초대 총리로,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의장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 에는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무런 제한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오랜 투쟁으로 주어진 것이다. 독립 후 4개월 동안 나치 대학살의 생존자들 5만 여명이 이스라엘로 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 여명 이상을 포함하여 모두 68만 7천 여 명으로 유대 인구가 급증하였다. 아랍 인구는 60만 명 이상이 독립 전쟁 동안 떠나고 16만 7천 여 명이 남거나 가족 재결합 계획에 따라 돌아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랍 각국에서 온 30만 명 이상의 이민자들은 이스라엘을 떠난 아랍인들 간에 실질적인 인구교환을 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큼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내핍은 물론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거주 유태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 제작,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 개발, 산업 발전, 도로, 전기, 통신망의 구축 등에 사용되었다.
건국 10년 후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하였다. 농업의 큰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작지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되었으며, 거의 5백 마일(800km)에 이르는 고속 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 건국 이전부터 유태인 공동체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이제 아랍계도 포괄하는 교육 제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5~14세의 모든 아동들에게 우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16세까지는 의무교육, 18세까지는 무상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자손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각 분야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문화 ?예술 활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백만 명 이상이 되었다.
? 1956년 시나이 분쟁
심각한 안보 문제들이 건국 후 수년 동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지 못했으며, 협정 위반 사례가 빈발하였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하여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 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살인과 방해 공작이 목적인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가 날로 증가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 기지로 변모해 갔다.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생존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이에 8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 방위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이집트의 에일랏 만 자유 항행에 대한 보장과 유엔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대한 유엔 긴급 파견군(UNEF) 배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 점령했던 지역에서 1956년 11월 ~ 1957년 3월의 위치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티란 해협이 개방되었다.

 

■ 확립기
이스라엘의 제2기 10년간(1958년 ~ 1968년)에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수출은 급증하였으며 GNP는 매년 10%씩 증가하였다. 수입해오던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같은 품목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갓 태동한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분야에서도 대단히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농산물에 대한 국내 시장이 급속히 포화 상태에 이르자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물뿐만 아니라 가공 산업을 위하여 매우 다양한 곡물 재배에 착수하였다. 급증하는 교역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도 지중해 해안 아슈돗에 수심이 깊은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음에 따라 외교 관계가 꾸준히 확대되었다. 이 10년간은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 엔지니어 교사 농학자 관개전문가 청소년 조직원 등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개발도상국들로 기술을 이전하여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나치 정권 아래에서 행해진(1933~1945년)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 온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사 교환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앞서 격렬한 반대와 대중의 논란이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국회 의사당이 지어졌으며, 하다사 의료 센터와 헤브루 대학교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정쟁 후 스코푸스 언덕 위에 버려져 있던 옛 건물 터에 세워졌다. 유대민족의 문화 유산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보존 연구하고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 1967년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너머 아랍 테러 단체들의 기습이 격화되고, 북부 갈릴리 지방의 농경 정착촌에 대한 시리아 포대의 지속적인 포격과 인접 아랍 국가들의 막대한 군비 등으로 이스라엘의 평온이 깨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사막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1957년이래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고,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였으며,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 받는 아랍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뒤에 합의된 협정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란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부의 이집트에 대하여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 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고원에서 저지시켰다. 6일간의 전투 뒤 기왕의 휴전선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새로운 휴전선, 즉, 유다 ?사마리아 ?가자?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 등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촌락들은 19년간 계속되어온 시리아의 포격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적과 이스라엘 행 선박의 티란 해협 통과가 확보되었고, 1949년이래 이스라엘과 요르단간에 계속 양분되었던 예루살렘이 재통합되었다.

 

■ 전쟁에서 전쟁으로
1967년 여름 이스라엘 외교의 지향점은 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주권, 영토의 통합, 정치적 독립, 군사적 위협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국경과 안전 속에서 각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에 대한 상호 인정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항구적인 평화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입장은 1967년 8월 하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이스라엘과의 비평화, 비협상, 비인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9월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둑을 따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 행동으로 소모전을 개시하였으며 양측에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한 1979년 여름에야 적대 행위는 막을 내렸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3년간 지속된 평화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합동 기습 공격을 가했던 욤 키푸르(유대력 속죄일)에 산산조각이 났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넜으며, 시리아 군대는 골란고원을 돌파하였다. 이후 3주 동안에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제를 역전시켜 침략자들을 격퇴시켰으며,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에 진격하였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20마일 이내까지 육박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 부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전쟁동안 점령했던 일부 영토에서 철수하였다.

 

■ 전쟁에서 평화로
1973년 10월 전쟁의 비용은 이스라엘의 1년간 GNP(국민 총생산)에 해당되었으나 1974년 하반기까지 경제는 1968~1973년의 경제 회복기에 기록했던 성장과 산업 팽창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으며, 1975년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장의 준회원이 됨에 따라 이스라엘 상품에 대해 새로운 잠재 시장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이 급증하여 이스라엘의 건국 30주년 즈음에는 방문객 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섰다.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걸친 노동당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정당들이 제휴한 리쿠드 연합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신임 수상 메나헴 베긴은 그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전임 수상들의 헌신을 되풀이 강조하고, 아랍 지도자들이 협상에 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와 이에 대한 아랍의 끊임없는 거부라는 순환고리는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의 예루살렘방문으로 깨어졌다. 이집트는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내민 이스라엘의 손을 평화롭게 잡은 첫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78년 9월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정상 회담이 열렸는데,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타결책이 제시되었다. 평화를 위한 기본 틀이 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다른 인접 아랍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위한 토대의 역할도 하였다. 게다가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1967년 이래로 통치하고 있는 유다, 사마리아, 가자 지구와 그 지역 거주민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위한 상세한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9년 3월 26일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밭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수상은 양국간의 30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10년간에 대한 희망과, 다른 인접 아랍국가 들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1980년대를 맞이하였다. 1981년, 세계는 양국 간에 강화된 협력을 토대로 마련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관한 양해 각서에 조인하였고, 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수주일 전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하여 이라크 원자로가 파괴되었으며, 그에 따른 핵 박멸 위협이 제거되었다. 이 시기의 10년 동안에 1973년 석유 위기 당시 아랍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유대 관계를 단절했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재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경제적 관계와 과학적, 기술적인 원조에 다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 이집트 평화 조약의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전의 휴전선 및 두 나라가 인정한 국경선에 대한 휴전 조약을 교환하면서 1982년 4월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 갈릴리를 위한 1982년 평화 작전
1948년 독립 전쟁 이후 설정된 레바논과의 휴전선은 결코 어느 쪽에 의해서도 도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강력한 PLO거점으로부터 반복되는 총격, 로켓 공격, 그리고 테러 행위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방위군은 1982년 6월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은 1970년 PLO에 대한 요르단의 추방이래 남부 레바논에 자리잡은 PLO조직과 하부 군사 조직을 그 지역으로부터 제거 시켰다. 작전은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던 10년간을 종결 시켰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의 무기력으로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5년 초까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들이 안전지대로 설정된 이스라엘 국경의 인접지역에 제한된 수의 군대만을 남겨 놓은 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 이스라엘 국내 시련
1984년 의회 선거에서 여러 정당으로 분산되어 안정 다수 의석을 차지만 정당이 없게 되자 리쿠드 당과 노동당이라는 양대 정치권으로 구성된 연립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새 정부는 연간 400% 이상 뛰어 오르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적극 나섰다. 임금과 환율의 동결을 비롯, 정부 지출의 과감한 삭감을 포함한 경제 조치들은 1986년까지 인플레이션 율을 19%가지 끌어내렸으며, 원활한 경제 성장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과의 자유 무역 지역 협정 체결은 이스라엘의 국제 교역의 지위를 더욱 강화 시켰다. 1989년이래 소련과 에디오피아로부터 유대인들이 들어오면서 유태민족에 대한 조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새로운 이민들을 국민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성공적으로 흡수하는 것이야말로 2천 년대에 이스라엘 사회가 당면한 주요한 도전의 하나일 것이다.

 

■ 중동의 평화를 향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평화조약 체결(1979)이후로, 중동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 그 결실로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1년에 마드리드 평화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이 회담 후에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 협상이 마련되었다.

 

■ 양자간 협상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과 PLO 간의 수개월간 오슬로 막후접촉 이후에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의 자치정보수립에 대한 초안이 마련되었다. PLO 는 테러행위를 중단하고 PLO 헌장에 이스라엘의 주권과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조항을 삭제할 것 등을 약속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뿌리박은 두 민족간의 오랜 갈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갈 것 등을 명시한 문서인데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1993년 9월 협정서에 서명을 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A,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로 인정을 하였다.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PLO는 워싱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이행 사항에 서명했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4단계로 이행되었다. 첫 단계는 1994. 5월 가자지구와 여리고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이 주어졌다. 같은 해 8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관광, 조세, 사회복지, 문화, 보건분야에 팔레스타인에게 대표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1995년 9월 선거를 통하여 팔레스타인 내의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1997년 1월에는 헤브론 대부분 지역과 서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철수를 규정한 협정에 서명하였다. 1998년 10월에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양측의 지도자들이 다시 회담을 시작하여 1995년에 서명한 잠정 자치안 이행에 대한 세부 항인 와이 리버 협정에 서명했다.


(2) 이스라엘과 요르단 :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마드리드 평화회의 후에 3년간의 협상 끝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1994년 7월 46년간의 전시상태를 종식하고 양국간의 평화를 선언했다.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은 아라바에서 1994년 10월에 클린턴 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서명되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평화협정 이후에 많은 분야에서 협력을 하고 있다.

 

(3) 이스라엘과 시리아 : 마드리드 협정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평화회담은 미국 고위급 관료가 참가한 가운데 양국의 대사급으로 워싱턴에서 가진 바 있다.
1995년 12월 ,1996년 1월 두 차례의 회담이 안보와 다른 주요 주제로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포괄적인 범위로 앞으로 검토와 양국 협상에 고려될 중요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 다자간 협상
다자간 협상은 중동의 지역적인 문제해결 모색을 목표로 하는 중동평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룰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다.
1992년 1월의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 회의는 36 국제단체와 국가들이 대표단을 파견하여 5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환경, 무기 감축, 지역 안보, 수자원, 경제개발등의 공동관심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 21세기를 향한 이스라엘
1995년 11월 라빈 총리의 암살이후 다음선거까지 시몬 페레스 외무부 장관이 총리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총리 대행은 반시 국회의원 중에서 임명되며 각료를 임명할 권리를 가지고 총리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나 국회해산권은 없고 차기 선거까지 총리업무를 수행한다.1996년 5월 선거에서 리쿠드당의 벤야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선출되어 민족주의 및 중도정당으로 연립내강을 구성하였다.
새로이 들어선 정부는 국가의 목표와 국가적 관심이 쏠린 분야를 위해 많은 업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특히 그 중에서 중동평화협상을 계속하는 일은 새 정보가 직면한 도전이다. 이스라엘 안보의 보장, 세계 각국과 외교관계 확대, 학교 수업시간 연장 및 소규모 학급으로 교육체계의 강화, 균등한 교육 기회의 제공, 이스라엘 산업에 기여하는 과학기술의 발전도모, 정부의 적은 개입으로 경제 경쟁력의 강화, 낮은 인플레이션,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정부 관료 조직, 국가 재정의 적자를 낮추는 일, 조세부담과 주택문제의 해결, 국가기반시설의 강화, 계속 유입되는 이민, 중동평화협상의 진전 등 이러한 사항들은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를 향한 이스라엘의 발전과 계속된 성장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 목차고리 : 간추린 이스라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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