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Index Previous chapter, Next chapter, Previous Book, Next Book, KJV

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요 1:1) 태초에 1)말씀이 계시니라 이 1)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요1:2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2)깨닫지 못하더라
(요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요 1: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요1:20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3)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4)진리가 충만하더라 헬, 참이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4)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5)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세례 요한의 증언(마 3:1-12; 막 1:7-8; 눅 3:15-17)

(요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눅3:15, 요3:28
(요 1: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말4:5, 마11:14, 신18:18
(요 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요 1: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ㄱ)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사 40:3
(요 1: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요 1: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6)세례를 베푸느냐 마21:23
(요 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6)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요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 1:28) 이 일은 요한이 6)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6)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마3:16, 막1:10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6)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6)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마3:11, 막1:8, 눅3:16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한의 두 제자

(요 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 1: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9
(요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

(요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1. 헬, 로고스 2. 또는 이기지 못하더라 3. 또는 자기 소유에 4. 헬, 참이 5. 어떤 사본에, 독생자가 6. 헬, 또는 침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을 참고하여 지필 되었다는 것에는 모든 신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저자도 먼저 기록된 기사들이 암시되어 있는 점을 밝히고 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된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증거로서 행하신 예수님의 이적들의 의의가 공관복음서에는 그 이적들에 대한 이야기가 진술되는 실제적인 방식에서보다는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눅4:17-21 참고)이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마11:2-6 참고)과 같은 진술들에서 발견되는 반면 요한복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건 자체에 관한 기록과 그 해석이 곁들여져 있다.
또한 공관복음서는 역사적인 순서로 대부분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신학적인 주제로 시작하고 있다. 아울러 요한은 주로 에비온(Ebion)과 씨린더스(Cerinthus)의 무신론적인 모독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아울러 그 주제가 마가와 누가는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이라면, 마태와 함께 유대인들에게 향한 복음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보고있지는 않다.

1:1-18 말씀의 성육신
1절 태초 ajrch'/(아르케) "첫, 기원, 시작"을 의미하며 그리스 철학에서는 만물의 시초라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요한은 이 단어를 즐겨 사용했는데 요1:2, 요일1:1, 2:13, 14에 나온다. 여기서는 단순한 시작뿐만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창세기 1:1의 태초 tyviareB](베레쉬트)와 같은 의미이나 구약의 시작은 우주의 시작이고 요한복음의 시작은 말씀의 시작이다.
말씀 lovgo"(로고스)는 "말씀, 진술, 연설, 교리, 명예"의 뜻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계시의 완성자이자 곧 그가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이 단어는 이제 단순한 말(마5:37, 마28:15)이 아니라 권능의 주로 사용하고 있다(눅4:32, 눅8:11, 요10:35).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구절이다. 이 말은 말씀으로 나타나지만 곧 그가 본질이신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어 나타나는 방법은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곧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이 말씀으로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 말씀이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본질 속에 속했으므로 그의 신성에 어떤 의구심도 허락지 아니하도록 선언한다.
주어와 동사로 이루어진 세 단계( 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인격성 하나님과 같은 분)로 요한복음 전체의 중심사상(기독론)을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 같다.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는 다시 한번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적 표현으로 유대 학습에서 흔히 사용했다(출13:9, 시 118; 136편, 잠1:8; 4:1-4; 6:20; 13:1). 특히 요한은 "진실로 진실로" !Amh;n ajmh;n(아멘, 아멘)을 무려 25회로 모두 두 번에 겹쳐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만의 독특한 표현 방법이다.

3절 만물 pavnta(판타)에는 관사가 없다(헬라어는 주어와 술어의 어순을 바꾸어 쓸 수 있다.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기 위한 방법은 관사이다). 그러므로 '만물'이란 현재에 국한된 뜻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우주를 말하며 역사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는 "말씀을 말미암아"를 뜻한다.
지은바 되었으니 ejgevneto(에게네토)는 어근 givnomai(기노마이) "수행되다, 취해지다, 정해지다"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단순히 "구성되어지다"의 뜻이 아니라 무(無)의 상태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뜻한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

zwh;(조에)는 aijwvnion(아이오니오스) "영원한"이라는 형용사와 함께 "영생"이라는 용어로 사용된다(요3:15-16, 요일5:12). 이 단어는 육체적인 생명력을 나타내며 생명은 물질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특징이 되는 생기이다. 우주 전체를 가리켜 일종의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zwh는 반대되는 개념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자연 현상에 속하기는 하지만, 생명의 근원을 yuch(영, 목숨)에 두고 있으면서 스스로 운동한다. 신은 불멸의 zwh를 소유하고 있다.
생명은 자연적 죽음과 구별되는 것으로 때로는 산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뜻으로 표현되기도 한다(막5:23). 죽음은 단순히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이다. 따라서 죽음에 종속된 생명은 일시적일 뿐이다(고전15:19). 예수께서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다(막5:23, 막9:18).
참 생명은 미래 적이며(딤전4:8) 절대적 의미의 zwh이고(막9:43) 살아있는 것이다(롬1:17). 참 생명은 불멸하기 때문에 영원하고(막10:17, 롬2:7, 갈6:8) 구원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참 생명을 얻는다고 해도(마7:13)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참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는 점이며 죽었던 자가 현재 살아 계시다고 하는 부활 메시지이다(눅24:9, 롬6:10, 롬14:9, 고후13:4). 그리고 그의 생명은 영원하다(계1:18). 구원이란 참 생명을 얻는 것이며 이것은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다(롬5:15, 벧전3:7). 예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행3:15), 그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롬5:10). 그는 우리의 생명 곧 하나님 안에 그와 함께 감춰진 생명이시며(골3:3-4),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롬8:2), 그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시며(요11:25), 길과 진리의 생명이시며(요14:6), 참 생명이시다(요일5:20).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의 생명은 일반적인 다른 생명체와는 분리시키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빛은 그 원천인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이 빛으로 자신들의 내면을 볼 수 있다. 이 빛이 없다면 사람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 해결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첫 사람에 의해서 타락의 길을 걷게되고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낯(빛)을 피하게 된 것이다(창3:8). 그러나 이제 그의 의해서 다시 생명의 빛이 비치게 되는 것이다.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빛과 대조되는 "어두움" skotiva(스코티아)은 생명을 가로막는 죽음의 세력과 그 세력 하에서 죽어 가는 많은 생명을 말한다. faivnei(파이네이) "비추다"는 3인칭 현재형으로 말씀이 빛이 현재에 계속해서 비추고 있음을 말한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katevlaben(카테라벤) "이해하다, 취하다, 다가오다, 깨닫다"인데 여기서는 '깨닫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죄악 된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처형했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이다. 이러한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다(요4:5-26, 31-38, 5:10-47, 6:25-65, 7:14-36, 8:12-59, 9:39-10:18, 22-39, 12:20-36, 13:1-16:33).

6-8절 저자는 지나가는 말로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고 있지만, 이곳에서 잠시 언급한 것은 그가 빛의 실체는 아니며 다만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왔다는 것이다. 본문은 요한의 소명을 강조하기보다는 태초부터 이어지는(1절) 말씀과 빛에 대해서 좀더 말하기 위해서 세례요한을 언급한다. 그가 빛 그 자체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최초로 언급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9절 ajlhqinovn(알레티노스) "진실한, 실제의"란 이 단어는 '거짓'(fales)의 반대 "진실"(truthful)을 말하기보다는 '가짜'(counterfeit)에 대한 반대의 '참'(real)을 말한다. 세상 어근단어 kovsmo"(코스모스) "세상, 질서 있는 정돈"을 뜻하는 단어에서 온 kovsmon(코스몬)은 우주를 뜻하는 말이다. 요한은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는데 주로 혼돈 되고 타락한 세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요3:16, 17, 19, 6:14, 8:26, 9:39, 10:36, 11:27, 12:46, 47, 16:8, 21, 28, 33, 17:5, 18, 18:37, 21:25, 요일2:15, 4:1, 9, 5:4, 5, 요이1:7).

10-11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는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까지 영으로써 세상에 함께 계셨다는 것과 성육신 이후 승천하시기까지 육체로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이 두 부분에 대해 어느 한쪽에 치우칠 필요는 없다고 본다. 1절부터 이어지는 '태초'에 관한 것과 본 절 뒤 부분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와 연결한다면 전자의 것이 되고 11절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을 연결하면 후자의 것이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자기 땅에 ta; i[dia(타 이디아)는 "자기에게 관한, 자기 자신의" 형용사 중성 복수형으로 요19:27에는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자신의 소유를 말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 하나님의 의해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말한다(창18:19, 신32:9, 출19:6).
영접 parevlabon(파랄람바노)는 "공동체적인 영접"을 말하고 lambavnwv(람바노)는 개인적인 영접을 말한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공동체로부터 집단에 의해서 따돌림 되었다는 것이다.

12절 영접하는 자 앞에 원문에는 de;(데) "그러나"가 있다. 이스라엘에 의해서 집단적으로는 영접지 아니한 것에 대립시키나,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길이 열려있음을 말한다. 영접한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은 분리되기보다는 하나의 뜻으로 이어지고 있다. 믿음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첫 단계가 영접이다. 그리고 영접한 것에 대한 책임은 믿음 pisteuvousin(피스듀오신)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믿음의 연속성을 타나낸다.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구원의 문제는 사람의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만이 무조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또한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그 무엇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원문의 접속사 ajll!(알라) "그러나"는 강한 반전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선언한다. 유대인들의 혈통에 관한 가치는 스스로 거룩한 조상에게서 낳았으니 자신들도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자랑거리는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족보였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9절에 말한 성육신에 대해서 다시 언급한 것이다. sa;rx(사룩스) "육체, 몸"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4:13). 요한은 영지주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의 '육신'이라는 이 단어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거하시매 ejskhvnwsen(에스케노센) "거주하다, 장막을 치다"의 뜻으로 장막에 사는 것처럼 "임시로 거하다"라는 의미이다. 은혜와 진리 이러한 표현은 삼하2:6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한 시편의 여러 구절들의 자비(시18:25, 51:1, 78:38, 111:4, 112:4, 116:5, 145:8)와 '진리'를 연결함에 영향을 받은 저자 요한이 자비를 은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진리는 말씀 속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이 은혜와 진리는 멈춰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는 계속되는 역사(役事)를 의미한다.

15절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marturei'(마르튀레오) "증거 하다, 증인이 되다"의 뜻으로 현재 직설법을 사용하여 요한의 음성이 사람들의 귀에 울려 현재에 생생한 것처럼 극적으로 재현시킨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원문으로 [내가 전부터 증거하기를]로 번역할 수 있다.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도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그분은 나보다 앞서 오셨다, 그는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16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위에"로 사용된 ajnti;(안티)는 " 때문에, 그래서"로 사용되는 전치사인데 여기서는 '은혜에 응답하는 은혜'라는 뜻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요구를 계속해서 채워주는 한없는 은혜를 말한다(고후6:2, 7:9).

17절 은혜와 율법,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를 비교하여 ejgevneto(에겐토) "왔다"를 사용한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한정적으로 주어진 것인데 반해 은혜는 율법의 모든 부족한 영역을 완성하는 마침이 되는 것이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원문으로 [결코 보여주신 적이 없는 하나님]인데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시내 산에서 대면했다(출33:11, 신34:10)는 명성을 얻었으나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은 아니었다(출33:17:34:9). 유한하고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33:20).
품 속에라는 표현은 아들과 부모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주는 히브리어의 숙어이다. 1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의 말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긴밀함과 일치됨을 말한다. 나타내셨느니라는 이 단어의 어근 ejxhgevomai(엑세게오마이) "선언하다, 설명하다, 해석하다"이다. R.S.V.는 '그를 알게끔 하셨다'로 번역했다.

1:19-28 세례 요한의 증거
19절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저자 요한은 세례요한의 중요한 질문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제사장들의 사신들에 세례요한에게 묻고, 들은 것을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고하게 되어있었다. 오랫동안 지도자 없이 종말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는 세례요한이 제사장 반열에서 나왔고 예기치 않은 그의 활동에 사람들은 모여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선지자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메시야를 고대하던 사람들에게는 그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이 때 까지는 예수께서는 공식적인 활동을 하시기 전이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세례요한의 신분을 알고 싶어했을 것이며 그가 혹 그리스도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20절 드러내어 oJmologevw(호몰로게오) "약속하다, 고백하다"를 두 번 연이어 사용함으로 그는 확실하고도 공개적으로 나는 ejgwv(에고) 일인칭 기본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그러면 21절 네가 엘리야냐라고 묻는다. 모세보다 엘리야를 언급한 것은 메시아가 일어날 때, 엘리야가 그의 새벽 별이 되리라는 말4:5절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묻는 사상에는 영혼의 회귀를 믿는, 말라기 선지자가 엘리야가 보냄을 받으리라고 선언했을 때 아합의 치하에서 살았던 그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은 그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엘리야라고 말씀하셨다(마11:14). 이것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적 임무를 띠고 있음과 그와 비교해 뒤질 것이 없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이 엘리야임을 부인하자 그 선지자냐 @O profhvth"(호 프로페테스)고 또 물었다. 이들은 신18:15를 기억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공동번역)라고 물은 것으로 보인다. 이 의미는 다시 그리스도냐는 물음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칼빈은 그냥 단순히 선지자 중의 어떤 한 사람이 아니냐 라는 정도 위에 다른 뜻이 없다고 해석했다.)
세례요한은 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을 마11:9에서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고 하셨다.

22절 이들은 돌아가 대답할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추궁하듯 어떤 대답이라도 하기를 원하였다.
23절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이사야 40장 3절을 증거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임무를 소개한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이사야는 비유적으로 성전의 황량한 폐허 상태, 또는 사람들의 심령을 가리켜 '광야'라고 했다. '소리'는 철학적으로는 그냥 쓸모 없는 시끄러운 소리를 의미한다. 요한의 임무는 외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소리'가 쓸모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24절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요한은 지금까지 대화의 내용만 적고 있다 중간지점에서 난데없이 이들의 신분을 밝혀주고 있다. 이것은 이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는데 이들의 속셈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이다. 이들은 당시에 가자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자들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25절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로 보아 이들은 종교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들의 행동은 월권이다. 세례요한은 이 물음에 대해 26-27절로서 대답을 대신한다.

26절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것은 뒤에 오실 분을 맞이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한 것임을 말한다. 이것은 '주의 길을 평탄케'하는 요한의 사명이었다. "물로"라는 의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마3:11, 막1:8, 눅3:16).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산헤드린 조사단은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것은 현재 서 계신 예수를 몰라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들이 무지하여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 이들에 대한 세례요한의 분개는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마3:7, 눅3:7)라고 꾸짖었다.

27절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막 1:7를 보라

1:29-34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의 가장 중요한 대속의 역사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양" ajmno;"(암노스)는 신약에서 같은 단어로는 4번 나타난다. 저자 요한에 의해서 한번 더 요1:36에 본 절과 같은 의미로 표현되었으며 행8:32 고난받을 때 어린양으로 나오고, 벧전1:19에 흠 없는 양으로 나온다. 모두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속죄의 양으로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유월절 어린양(창22:2-8, 레14:10-25, 민6:12)과 이사야 53장의 예언에 따르는 것으로 항상 그리스도께 적용시키고 있다(요12:38, 마8:17, 눅22:37, 행8:32-35, 벧전2:22-24).

31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예수와 세례요한은 친족 관계며(눅1:36)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까지 모태에서도 그의 어머니들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어려서 성장과정에서도 충분히 서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호의나 우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 자신도 하나님께로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 외에는 아는바가 없다는 것을 선언함으로 자신이 말하고 깨달은 것도 그리고 현재 행하는 일들도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것은 자신의 임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다. 나중에 다른 곳에서 논쟁이 있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물으신 질문 속에서 "그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마21:25)는 것은 또 다른 증거가 된다.

33절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세례요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미리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마3:14에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라고 거부하며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라고 보기보다는 비둘기의 형상을 통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확증시켜준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1:35-42 베드로를 전도하는 안드레
세례 요한은 29절에서 불렀던 예수님께 행한 36절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다시 반복하고 있다. 37절 이 말을 듣고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처음으로 따르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을 허락하고 길을 열어준 것은 세례요한이었다. 이 두 제자 중 하나는 40절의 안드레였다. 그러나 또한 제자가 누구였는지 밝히고 있지는 않다. 신학자들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저자 자신 요한이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로 바리세인들과 논쟁에 직접 들은 장본인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기록한 책에 밝히는 것에 인색했다.
좇거늘 kolouvqhsan(에콜루데산) "따르다, 쫓다"는 지적, 도덕적, 종교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요1:43, 마8:19, 마19:27, 막6:1, 막8:34).

38절 무엇을 구하느냐 zhtei'te(제테이테) "물어보다, 찾느냐, 구하냐"로 예수께서 물어보았다.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원론적인 물음이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구원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6:33, 마7:7, 눅11:9, 눅12:31).
랍비여 @Rabbiv는 "존경하는 분"이라는 아람어 뜻이다. 초기 유대교에서부터 이 용어는 일반적인 선생님보다 더 공경하여 높여 부르는 말이다. 당시에는 특히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선생님에게만 부르던 용어였다. 이들은 정중한 어투로 예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39절 와 보라의 예수님의 초청에 응한 두 제자는 그 날 함께 거하니는 사실 역사적인 밤을 맞고있는 것이다. 이 장소에 관하여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형제와 함께 자란 나사렛의 집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신 요단강 베다니 근처일 임시 처소일 것이다.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당시의 시간은 낮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12시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해지기 2시간 밖에 남지 않은 오후 시간을 말한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처음으로 예수님이 초청한 밤을 함께 지내게 된다. (여기의 시간은 우리에게 사실 어떤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또 한번 증명하는 것이 된다.)

40절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형제 베드로에게 전했다. 그러나 현재의 기록에서는 오히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이미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였음이 잘 알려진 탓이었다.

41절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원문에는 euJrivskei(휴리스키)와 EuJrhvkamen(휴레카멘)이 나온다. 이 단어는 eujrivskw(휴리스코)의 "찾다, 갖다, 보다"의 뜻이 있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시몬을 찾아"의 euJrivskei가 사용되었고 또 한번의 EuJrhvkamen은 번역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 용어를 포함하여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가 된다. 이 의미는 현재 돌아다니다가 예수를 발견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유대인으로서 오리라한 메시야를 "이제 만났다"는 뜻이다. 이 기쁨은 놀라운 것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들은 베드로에게 숨돌릴 겨를도 없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42절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Sivmwn(쉬메온)은 구약의 12지파의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 이름과 같은 것이다. 신약에서도 사도행전 15:14에서는 '시므온'으로 말하기도 했다. 이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것처럼(창34:25-31), 변화되기 전의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급한 사람이었다(마26:31-35, 막8:32-33, 눅22:31-33, 요18:10). 그러나 장차 교회의 시작이 되는 '베드로', 아람어로는 '게바'(반석)이란 뜻의 이름을 붙여주신다.

1:43-51 빌립과 나다나엘
43절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지는 갈릴리였다. 당시의 갈릴리는 예루살렘과 달리 헬레니즘 문화의 유입이 극심했으며 일반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절). 이러한 갈릴리의 사역은 구약에 예언된 성취라 하겠다(사9:1-2, 마4:14-16).
나를 좇으라 빌립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이 한마디를 들었을 때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은 욕망으로 불이 붙었다.

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는 말씀에서 그도 43절 이튿날로 보아 이미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주위로부터 들고, 예수께서 자신도 불러주기를 기대했었는지 모른다.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빌립의 반응은 예수께서 좇으라 하시고 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고 즉시 그가 벌써 다른 사람(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전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예수를 좇는다는 것은 전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Naqanah;l(나다나엘)은 본서에만 나타난다.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46-48절). 아마도 이 사람도 빌립과 같이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빌립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한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 학자들은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생각하기도하며 마태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점을 들어 동일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모두 희박하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모세의 율법과 선지자 기록에 의한 예수를 잘 소개했다. 그러나 그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적인 신분을 제시했다. 빌립의 증언은 자신이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꾸밈도 더함도 없는 솔직한 그의 전도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적 신분이나 제시가 구체적으로 되지 못했다. 그래서 바로 나다나엘

46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한다. 빌립은 이에 대해서 자신이 모두 설명하려고 들지 않는다. 예수께서 바로 옆에 계시기 때문에 직접 소개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와 보라고 말한다.
예수와 나다나넬의 대화를 통해서 어렵게 생각되었던 예수님의 신분이나 다른 문제들이 복잡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예수는 그를 미리 눈여겨보았던 것에 대해서 47절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평가하셨다. 48절 빌립이 전도하기 전에 예수께서 그가 무화과 나무아래 있던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실만을 가지고 나다나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전도하기 위해서 좋은 말로 그에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신적 능력에 의해서 그를 보고 계셨고 이미 알고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빌립이 전한 나사렛 동네에 대한 문제는 나오지도 않는다. 이미 그의 신적 능력에 그 자신이 좋게 평가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예수의 신적 예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다나엘빌립이 전해 주었을 때 해결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렸을 때

49절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고백했다. 예수께서는

50절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현재 경험한 예수의 신적 예지능력보다 더 큰 일들을 보게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를 따르면서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현재의 우리는 이미 이러한 일들의 경험을 기록을 통해서 전해듣고 있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독자들이 적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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