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Haggai)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상대적 가치 -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 (학1:4)

이 말씀을 통해 선지자 학개는 당시 사람들이 상대적 가치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게 된 것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고 있다.

성전은 황폐해 있었다. 아니, 15년 동안이나 계속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적들의 위협을 받기 시작하자, 이를 중지하였다.해를 거듭했으나, 기초석 이외에는 아무것도 선 것이 없었다. 또한 이때까지 작업장이 잡풀과 쓰레기로 덮여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학개를 통해 그의 백성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일어나 성전을 건축할 것을 요구하셨다. 본문의 질문은 사실상, 성전 건축의 책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백성들이 한 말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들의 의무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더우기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도다(1:2)

우리가 이 태도를 이해하기는 매우 쉽다.왜냐하면 이 태도는 자주 되풀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을 끝내야 하기는 하지만 아직 그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기를 매우 좋아한다. 영적인 기회가 이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 속으로 그 기회가 도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말에 대한 응답이었다. 본문에는 하나의 대비가 있는데 그것은 실로 3중적인 대비 즉 사람의 대비, 집의 대비,상황의 대비이다.

사람의 대비에 있어 한 편은 지칭되어지지 않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칭되어 있다. 그들은 아주 명확하게 일컬어지고 있다.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이 말씀의 번역이 불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나는 히브리어가 보다 잘 옮겨졌으면 무엇인가 더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여기서는 "너희" 라는 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바로 너희의 강조는 학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진정 누구인가를 상기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뛰어난 역사를 가진 백성,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진 백성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 대한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백성이었다.

그 다음에 나타난 대비는 집에 대한 것, 즉 "너희의 집"과 "이 전"의 대비이다. "너희의 집"곧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그들이 안식과 수면을 위해서 들어가 쉬는 집, 그들의 가정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반면에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만나기 위해 지정하신 장소였다.

그 다음은 상황은 대비이다. 그들은 "판벽의 집"에 거하고 있었다. 그 집은 갖은 방법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집, 즉 비싸고 사치스런 집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15년 동안 상당한 번영을 누려왔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판벽한 집"을 건축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집"은 황무하였으며, 미완성인 채 버러져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은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전의 건축이 중요한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보다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악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파괴적이고 간악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알기는 제대로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우선적인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었다. 물질적으로 그들은 성공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벽한 집을 건축했다. 그런데 그때 고난이 닥쳤다. 따라서 전을 건축할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아주 그럴싸한 것이었다.

학개는 예언을 처음 할 때에, 그들에게 돌이킬 것을 권하였다. 그는 두번 이상, 그들에게 먼저 자신들의 길을 살피고 일이 어찌 잘 안되는가를 살피라고 말했었다. 그들은 많이 뿌렸으나 거두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먹기는 먹었지만 배부르지 않았고, 마시긴 마셨으나 충족치 않았다. 또 그들은 입기는 입었으나 따뜻하지 않았다. 그들은 돈도 모았으나,구멍 뚫린 전대에 모았다. 이는 매우 냉소적인 묘사이다. 아마 이는 실제 물질적인 상황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상황에 관한 묘사일 것이다.

다시 한번 그들에게 자신들의 길을 돌아보도록 명해졌다. 즉 그들은 산으로 가서 나무를 잘라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것을 명령받았다.

이는 오래 전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상대적 가치의 중요성에 관한 교훈 즉 먼저 하여야 할 것을 먼저 하는 것,우선적인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돌렸을 때 오는 결과적 재난에 관한 교훈을 준다.

본문에 비추어 우리의 현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이러한 실패로 인한 일어날 재난에 관해 생각해 보자. 또 이 실패가 어떻게 고쳐질 수 있을까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는 민족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삶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정의에 앞서 재물을 생각할 때, 인간보다 경제적 번영을 더 중히 여길 때, 그리고 하나님 이전에 인간에 더 집착할 때 민족적 삶에 있어 상대적 가치를 잊어 버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 민족의 삶에 인용될 수도 있다. 우리가 나라의 법전을 살펴보면, 아이들을 보호하는 법보다는 재산을 보호하는 법이 훨씬 더 많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경찰 재판소 기관지를 읽어보면 사람의 인격에 해를 끼친 사람에게보다 , 재물이나 재산상의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더 심한 벌을 가하시는 판결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최근의 우리 역사에 있어 이러한 문제가 많이 개선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아직 충분치 못한 것이 사시링다.

특별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앞서 인간의 욕망을 생각할 때,우리는 먼저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얕은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또 인간의 얕은 생각을 심화시키기까지 한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 파악하고,인간의 행복을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깨닫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인간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이 광범위한 문제를 지나, 우리의 사회적 삶, 즉 인간과 인간 간의 상호 관계를 살펴보자. 우리가 사회적 활동의 이유를 영적인 곳에서 찾지 않고,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에서 찾는 것은 사회적 삶의 기준에서 볼 때, 역시 먼저 하여야 할 일을 먼저 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삶의 조건을 삶의 특질보다 우선해서 생각할 때, 가치 혼돈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이 시대에 빈민촌 정비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활동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지만, 빈민들보다 빈민촌에 더 신경을 쓴다면 우리는 실패하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예술의 영역에도 같은 진리가 적용된다. 나는 인간이 예술을 가져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우리가 예술을 낳는 정신적 능력보다 예술적 표현에 더 집착한다면, 우리는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예술만을 낳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우리가 삶보다는 물질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물질에 대한 욕망에 거의 정복되었다. 또 물질은 종종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않았을수록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전체 사회 구조에 위험한 자기 중심적 소유욕이다.

이제 개인적으로 적용시켜 보면,우리는 사람이 삶보다 생존데 더 관심을 가질 때, 또 아침에 하는 생각과 낮 동안의 활동이 일시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영원한 것에는 태만할 때, 이는 먼저 하여야 할 일을 먼저 하는데 실패한 것이라는 점을 곧 알게 된다. 창조보다 휴양을 먼저 생각할 때, 오락을 자극적이거나 마취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그리고 하나님의 성경에 충만하기보다,방탕함이 있는 포도주에 취하기를 더 열망할 때,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여야 할 일을 먼저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보다 재물에 신경을 쓰고, 우리의 재산이 모든 것이고, 하나님의 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적 삶에 있어 이러한 태도의 결과는 파멸일 뿐이다. 나라는 죄의 굴레에 매어 있을 것이고, 비천한 노고에 시달릴 것이며, 악의 멍에를 목에 메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성의 퇴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민족적 삶의 마비는 반드시 재난을 초래한다. 어떠한 계획도 그 삶을 이끌기에 충분치 못할 것이고, 어떠한 힘도 역부족일 것이다. 우리는 거의 하나님을 잊었다. 또 우리는 언제나 그러하지는 않지만 대개의 경우에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또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하곤 한다. 우리는 세노타프 성역(Cenotaph:런던에 있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 기념비 - 역주)에 모여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지난 날 우리의 도움이셨던 하나님,
다가올 날에 우리의 소망이시다.
폭풍 속에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시다.

노래만 이렇게 하고, 다가올 날에 있어 우리의 소망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위선자이다.
사회적 삶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하여야 할 일을 먼저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동물적 생활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먹고 마시자, 내일은 죽고 말리라.

이는 때때로 한탄스럽게 말해진다. 또 이것이 사악한 동물주의의 표현임을 잊어버리고 부주의한 우스갯소리로 말해지기도 한다.이러한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삶은 파멸의 길을 걷는다. 만일 빈민가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전원 도시에서 살게 하였는데 그의 성품이 옳지 못한다면 그는 전원 도시로부터 다시 빈민가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태도와 행위는 사물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수 없게 한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결코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장님도 그림을 소유할 수는 있다. 하지만 보지는 못한다. 귀머거리는 "메시아"곡에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들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틈간 사이로 잡아 뜯어 손에 넣을 수도 있다.그러나 하나님을 볼 수는 없다. 사람이 넓은 땅을 소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상대적 가치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땅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각각의 심령에 적용시켜 보자. 먼저 하여야 할 일을 구별하고 행하는 데 실패하면 결국은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어 당연히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내 재물, 내 재물, 내 재물"한다. 그러나 그 사람을 몹시 조롱하는 한 음성이 들려온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학개의 처음 선포 가운데는 모든 비유적 표현이 적용되고 있다. 가난이란 수고해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족함 없이 먹는 것은 배고픔이고, 끊임없이 마시는 것은 목마름이다. 따뜻함이 없는 입음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구매력 없는 임금은 환상이고 낟알 없는 껍질이다. 또 그림없는 틀이고 삶이 없는 삶이다.

그러면 치료책은 무엇인가? 해답은 간단하다. 상대적 가치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전이 먼저이어야 한다. 그의 영과아, 그의 은총, 그리고 그의 주장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 자신과 우리 환경이다. 우리의 의존성과 우리의 의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 최고의 치료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회복이다. 하나님 없이는 어떤 것도 선할 수 없다. 퀼스 (Quarles)는 기묘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은 옳았다.

 당신이 없다면, 땅에 생기가 없을 것이고,
 당신이 없다면, 바다에 보물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없다면, 공기는 더럽혀질 것이고,
 당신이 없다면, 하늘엔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누리게 되는 평안과 즐거움이 없다면,
 나에게 땅, 바다, 공기 그리고 하늘이 무슨 의미를 갖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졌어도, 당신이 없다면, 내가 가진 것
 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이 없다면 나의 수고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당신만이 나의 기쁨,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당신만 있다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이겠습니
 까?
 나는 바다도 바라지 않고, 땅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또
 하늘을 소유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이 없는 하늘이라면!
우리의 민족적 삶에 있어서, 정의가 수익이고 개개인이 재산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사회적 삶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필요한 모든 것이 더해지리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한다. 개인적 삶에 있어서 그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또한 최고의 것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비중의 참 의미(상대적 가치의 중요성 - 역주)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선이며, 사회적으로는 인간이 그가 살고 있는 상황보다 우선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육신보다 영혼이 우선이다.

이스라엘 시인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이스라엘 시인은 노래했다.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
 까지 하더라(시132:3).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